남아 있기

미투 운동의 일환으로 서지현이라는 검사가 자기가 겪었던 성폭력과 인사 불이익에 관한 글을 올린 게 화제다. 직접 얼굴을 내밀고 티비 인터뷰도 했는데, 그게 얼마나 어렵고 리스크가 있는 일인지 알기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많은 이들이 지지한다. 너무도 명백하니까. 어쩌면 이렇게 말만 제대로 하면 어느 쪽이 불의인지 뻔한 이야기들도, 옆에서 수 없이 당하고 마는 다른 여자들처럼 될까 싶은 그 겁 때문에 이야기되지 못하다.

참 이상한 게, 결국은 용기를 내고 실명을 까고 얼굴을 드러낼 때에야 힘이 붙는다. 익명으로 이야기하다 결국 지쳐 돌아서거나 퇴사할 때, 자살로 무언가를 알리고자 할 때 번번히 넘지 못하던 어떤 선을 넘는다. 이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매번 깨닫는다. 결국 세상은 살아 있는 사람, 조직 안에 남는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 있어야 하고 남아 있어야 한다. 한 방에 둘이 같이 있을 수 없다면 힘들더라도 나쁜 놈이 나갈 때까지 버텨야 된다.

어쨌든 그 검사가 그 말 하는데 8년이 걸렸다고 해서 이상하게 마음이 먹먹했다. 그 숫자가 낯설지 않았다. 여자들이 당하는 일들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간신히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이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나, 학창시절 똑똑하고 잘나던 우리들은 진짜 사회의 가장 경쟁 치열한 구역에 던져지기 전까지는 보호와 존중을 받는 편이라, 그제서야 세상의 추함이 던지는 폭탄들을 맞게 된다.

솔직히 사회생활, 결혼, 출산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다 트라우마급 폭력의 연속이다. 그것들이 갑자기 인생에 몰아칠 때는 인간으로서의 균형감각을 전부 상실할 정도로 강력하게 몰아친다. 무엇이든 힘들어서 그냥 포기해버리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그게 다 무엇이었는지 얼마나 내 잘못이 아니었는지 그 의도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얼마나 더 저질스러운 것들이었는지를 종합적으로 깨닫고 정신차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딱 8년 정도인 것 같다. 그 8년간 남(자)들 하는 거 하나도 못하고 세상으로부터의 폭력과 싸운다. 운이 좋게 그걸 버텨냈으면 변신을 한다. 즐겁고 천진하고 사람좋은 수재는 어느덧 전쟁 베테랑처럼 온갖 못 볼 것들을 보고 잃을 것들을 어느 정도 잃고 돌아와 묵묵하게 싸우는 전사 비슷한 마인드를 탑재하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좋든 싫든, 남아 있어야 하겠어. 이렇게 되뇌여 본다.

 

lil’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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