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일

고통에 관한 생각들을 멈춘 적은 없지만 그래도 꽤 오랜만에 글을 쓴다. 하루키가 쓴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를 읽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 무언가 근원적인 감동이랄까 울림이랄까를 좀 느꼈다. 막 되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도 ‘근원적인’ 울림이라는 것들의 영역은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런 것을 느꼈던 건 ‘뽀로로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을 보면서였다. 뽀로로네 팀이 무시무시한 실력자들과 함께 슈퍼썰매 경주를 하는 이야기인데 악당 불곰 푸푸가 뭐랄까 진짜 악당처럼 불쾌한 구석이 있다.

악당이므로 예상 가능하듯 반칙과 편법을 써가며 죄없는 친구들의 뼈를 부러뜨리거나 탈락시키는 거야 기본인데 결정적으로 이 나쁜 노무 시키는 자기가 쓰레기같은 짓을 한 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뽀로로가 목숨을 구해주자, 바로 배신하고 비웃으면서 떠나 버린다. 이제 사탕 연료가 다 떨어진 뽀로로와 크롱은 치사한 불곰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그 외롭고 쓸쓸한 계곡에서 얼어죽게 생겼다.

여기서 시청자는 꼭지가 도는 것이다.

위험에 처했을 때 겁먹고 애처로운 표정을 짓던 그 불곰 녀석이, 자기가 안전해지는 순간 같은 곤경에 처한 타인을 비웃고 이용하는 것. ‘타이타닉’의 그 약혼자 새끼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차없이 걷어찰 때처럼, 이야기는 어떤 알 수 없는 ‘근원적인’ 선을 딱 건너가는 것이다.

그냥 악당이니까 이겨야 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저 놈이 일등을 해서 슈퍼썰매 계를 쥐락펴락 하게 되는 순간, 인간성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침해를 안게 되는 그런 느낌인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뽀로로는 푸푸를 이겨야 한다. 그것은 일개 뽀로로와 크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이런 ‘근원적인’ 것들이 무엇일까 생각을 좀 해 봤다. 어떤 이야기가, 썰이, 심장을 뜨겁게 하거나 소름 돋게 만드는 포인트 말이다. 인도에서 길을 잃었다가 입양된 후, 엄마와 형이 아직도 자기를 찾고 있을까봐 기억만 가지고 찾아가는 ‘라이언’의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항상 이런 것들엔 그냥 두기에는 너무 슬프거나 너무 불편한 어떤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 푸푸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던가. 잘 살아 있는 자신이 잘못되었을 것을 생각하며 매일매일 한숨 쉴 어머니라던가. 언젠간 반드시 오고야 마는 죽음이라던가.

아마도 ‘언젠가는 오고야 마는 죽음’이 하루키의 달리기 책을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 발 한 발 매일매일 달린다는 행위 끝에는 결국 그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그 책을 읽으면서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에 합당하게 마지막 페이지는 그가 생각하는 묘비명으로 끝난다.

빛이 그림자를 만들지만 그림자가 빛을 볼 수 있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lil’pain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