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시대는 가고

인터넷에서 흔히 쓰이는 욕 중 ‘선비질’ 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에 상응하는 반개념은 많이들 쓰는 ‘xx충’ 같은 말들이다. 여러 차원에서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놀랍다. 최근에 다른 나라에 온전하게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외국 친구들이나 외국 사이트들에서 느껴지는 바로는 이 부문 하나에서만큼은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는 느낌으로 엣지를 먼저 보여준다는 인상이다.

페이스북이나 레딧 같은 것들이 존재하기 전에 싸이월드와 디시인사이드 같은 것들이 있었고 아마도 다른 전통적인 여가문화가 전무한 탓 + 일상화된 참견의 문화 덕인지 인간들은 거부감도 거리낌도 없이 시냅스를 통신기기에 부착해버리는 데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2012년에 쓴 책 ‘Heroes: Mass Murder and Suicide’의 거의 마지막 장에서 서울을 다루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써 놓았다. 그의 다른 책에서는 무솔리니와 베를로스쿠니 등을 언급하며 이탈리아의 정치적 지형이 세계의 정치적 흐름에 대한 예고편처럼 한 십 년쯤 앞서서 트렌드를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한국의 디지털 미디어의 흐름도 그런 식의 예고적 성질을 지니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생각을 해 본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일베’ 유저든 네이버 악플러든 우리가 스테레오타입으로 상상하는, 현실 세계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열등감에 가득찬 루저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상대’ 진영에 대해 극단적인 언어를 쓰는 가장 과격한 태극기 집회 참여자들 중에도 아주 멀쩡한 가치관을 지니고 아주 멀쩡한 사회생활을 하며 개인적 차원에서는 정치적 차이에 대한 존중도 할 줄 아는 인간들이 많다는 걸 나는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에게 그 집회는 일종의 취미 활동이자 친목 모임 같은 활동이다. 어떻게 이런 점잖은 사람들이 그런 무시무시한 표현들을 쓸 수 있지? 생각을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적’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을 뿐이다.

방점은 ‘취미’라는 그 말에 있는 것 같다. 타 집단에 대한 혐오든 눈에 띄는 ‘공인’들에 대한 악담이든 그것은 그냥 작은 놀이거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상대를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공간에 있는 분리된 존재로 설정하고 쉽게 말을 한다. 지나가다 말 하나 얹는 게 무슨 큰 죄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정의’의 편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쓰이는 단어의 양식 자체가 상대방을 ‘개인’이 아닌 ‘집단’의 딱지를 붙이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개인성을 지워버리는… 그들이 자신들이 언어로 자행하고 있는 폭력의 강도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이 전쟁터에서 이름붙이기나 욕이 아닌 방식의 대화 시도는 ‘진지충’ 또는 ‘선비’라는 이름으로 쫓겨난다.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롭다. 그 딱지가 의미하는 바는 ‘당신은 우리의 대화법을 모르고 이 언어로 싸움을 할 줄 모르므로 이 세계에서 무능하다’ 라는 뜻인 것 같다. 유머를 모르는 자, 또는 위선적이거나 나이브한 자로 딱지가 붙는 것은 소통의 자격을 빼앗는 행위이다. 애시당초에 그럴 거면 왜 이 슬럼에 와서 말을 섞으려고 하느냐. 흑인 게토에 와서 헛소리를 하는 잘 사는 백인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그렇게 이성을 튕겨내고 고집스럽게 이들은 ‘소일거리’를 지속한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

악플이든 트위터 마녀사냥이든 실제로 그것을 당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입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런 것들이 일으키는 결과가 적지 않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개성이 강한 ‘센캐’ 라거나 문화권력이 있어 보이는 이들도 사실은 그저 소심하고 상처 잘 입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피해자들은 일종의 대형 스케일의 이지메 같은 걸 당한다. 여기에는 흔히 들어가는 가해자들의 표현 ‘그럴 만 하니까 당하지’도 항상 따라다닌다. 학창시절 교실에서 다음 왕따 대상을 물색하듯 미디어 깡패들은 틈새를, 약점을 잘도 잡아낸다. 특히 내 심사를 거스르는 건 대체로 표적이 교묘하게 강자로 포장되었지만 사실은 약자이기 때문에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여자라던가, 어리다던가, 저항하면 손해보는 위치에 있던가, 등등.

학교의 괴롭힘과 다른 점은 이 표적들은 ‘까여도 되는’ 대상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거나 공인이거나 팔로워 수가 많거나 집안이 금수저거나 공직자거나 하여간 무슨 핑계 하나는 있다. 이 프레임에서 그들은 부나 권위나 유명세를 지니고 있어 ‘우리와는 다르고’ 부당하게 호사하는 존재다. 여기에 소비자로서의 ‘갑질’까지 더해진다. 아이돌이나 배우들은 정말 고생이 심하다. ‘네가 대중의 호감으로 먹고 살려고 이 길을 선택했으니 태도를 똑바로 하라’ 같은 소리들.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선비’에 대한 증오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선비’는 이 세계의 폭력성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가한 사람들이다. 그 유형은 한 세대 전의 유형들이다. 부모가 제시한 가치를 그대로 따르기 싫다며 반항하던 X 세대들. 무언가 다른 멋진 가치를 찾아 방황하고 문화의 언저리를 돌던 세대들. 한량들. 한량의 문화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지금 세대를 기준으로 한량이란 혐오스럽기 그지 없는 존재이다. 유튜브 채널만 있으면 돈도 벌고 뭐든 할 수 있는 시대의 가치는 성실함과 전투력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산업 내에서 노동계급을 무력화 시켜버렸지만 미디어는 ‘보통 사람들’에게 다른 종류의 권력을 주었다. 그래서 어쩌면 얘네들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이 새로운 영토에서 갱을 만들어 깡패질과 함께 권력다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건 인터넷 문화의 다크한 영역이 폭발적으로 보인 만큼 이에 대한 자체 이해도도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이건 참 재미있다. 빨리 배운다고 해야 하나. 과격한 언어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인간의 감수성을 하향 평준화 시키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각 문장들의 의도나 진위를 어느 정도 구별할 줄 안다.

이게 다 어디로 가는 길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선비의 시대는 갔다는 거다.

 

lil’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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