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순환

해마다 유난히 올해는 더운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후덥지근한 사우나 같은 공기를 뚫고 냉방병으로 인한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길을 걸었다.

이런 의문에 누군가는 94년의 기록적인 폭염 이후로 가장 더운 해가 올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94년이 갑자기 기억이 났다. 그 해 더웠다. 그 해는 어떤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페트병에 담긴 멸치액젓을 결명자차로 착각하고 꿀꺽꿀꺽 삼켰다가 뿜었던 해였다.

그 날 하루동안 온 집에서 멸치액젓 냄새가 났다. 옥상에서 놀던 우리가 집으로 내려와 들어섰을 때 그 냄새가 충격적으로 온 집안에 퍼져 있었던 딱 그 순간의 광경이 기억에 선명하다. 그 때의 햇빛, 장판 색깔, 그 집의 구조, 냉장고가 있었던 위치, 현관문과 창문이 열려 있었던 모양…

다시 한 번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다.

후각적 충격이든 심리적 충격이든 ‘충격’과 관련된 기억들은 아주 생생하다. 어렸을 때 외삼촌이 장난으로 어떤 유적지의 비석을 둘러싼 구조물 안에 가둬놓은 채 버리고 가는 척을 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나는 다섯살도 안 되었을 거다. 어느 장소인지는 모르겠지만 돌로된 비 같은 것들이 들어 있는, 빗장이 쳐진 공간이었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 창살 사이로 나 있던 길과 나를 놀리는 웃음을 웃으며 걸어가던 외삼촌 무리의 모습, 그리고 그 주변에 나 있던 잔디의 색들을 기억한다. 나는 울었다. 놀란 어른들은 장난이라며 다시 와서 나를 달래주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그 곳에 갇혔다고 생각해서 당황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식으로, 우박이 심하게 내리던 날 엄마의 차 뒤쪽에 앉아 치과에 가던 어떤 날 오후의 차 창문의 모양이나 실내의 색도 기억에 선하고,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술집’에서 (불법적으로) 술을 마셨던 날 앉았던 자리의 테이블 색, 위치, 실내장식, 앉았던 위치, 레몬소주를 담았던 주전자의 모양 같은 것도 기억이 난다.

반면 어떤 것들은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생각해낼래야 생각해낼 수 없는 이름들, 공간들, 사건들. ‘충격’이 다소 부족한 요즘의 일상이 기억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일까. 생각보다 사진도 잘 안 찍는 요즘, 사진에 남지 않은 것들은 사라지겠군.

친구로부터 받았던 한 궤짝의 맥주가 소진되고 나자, 또 다시 생의 감각들이 여과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네 가지 사이클이 순환하는 세대교체론에 입각한 미국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저자에 의하면 세대마다 그 전 세대가 짜놓은 역사적 이벤트에 영향을 받은 특징을 지니고 자라나며 유년기, 청소년기, 중년기, 노년기의 네 가지 생애 단계로 넘어설 때마다 역사 자체의 기류가 바뀐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순환하는 사이클의 모양을 지니고 있고, 지금 우리가 키우는 우리의 자녀들은 ‘노마드’가 아닌 ‘영웅’ 모드의 세대라고.

저자는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순환하는 계절을 바라보듯 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 여름은 바로 직전의 봄이 아니라 전 년도의 여름과 공통점이 많다는 걸, 선조들은 알고 있었다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노마드’기가 막을 내리고 ‘영웅’기가 다시 시작되려 한다는 그 말에서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는 인생의 네 단계에서 나는 확실히 청소년기를 지나 이른 바 ‘mid life’라고 하는 기에 들어섰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자 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로 나의 청소년기에 대한 회고를 길게 했다. 미드라이프라는 건 도대체 뭘까. 청소년기가 뛰놀기 좋은 꽃밭이 있는 계곡 같은 거라면 확실히 미드라이프는 지금까지 쌓아온 생존 기술로 건너야 할 각박한 사막 같은 인상을 준다. 확실히 미드라이프는 좀 외로울 것 같다. 확실히.

그런데 무엇을 향해 건너는 사막일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일상이란 것은 너무도 매력이 없어서 어떤 순간엔 나를 화나게 한다. 밥 시간이 된다고 밥을 하거나 차릴 걱정을 하는 우리의 부모들의 그 ‘밥’ 얘기조차도 어떨 때는 그냥 딱 싫다. 도대체 밥을 짓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밥을 해야 할텐데…’ 라면서 그 밥이라는 일정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지는 그 느낌이 그냥 죽도록 싫다. 세상엔 생각할 것도 많고 고민할 거리도 많은데 왜 당신들은 매일같이 나에게 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가.

그게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정상적인 일일까?

 

lil’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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