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욕의 효과

스티븐 프레스필드는 첫 번째 원고를 마침내 마무리했던 날 외쳤다고 한다.

“Rest in peace, motherfucker.”

여기서 저 머더퍽커의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방송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여러가지 기준의 심의를 받게 마련인데, 19금 딱지가 붙는 순간 성인인증을 하고 로그인을 하거나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무한히 짜증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청불이 붙는 순간 극장 관객수는 어마어마하게 깎여나가겠지.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씹쌔끼’를 ‘바보’로 바꾸어서는 도저히 안되는 문장이라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냥 오로지 쌍욕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통쾌함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엔 누가 전화해서 자긴 힘들어 죽겠는데 가정과 직장 양쪽에서는 분명히 성에 안차서 못마땅할거라며 지금 이러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으면 아무도 자기를 아끼거나 안타까워하기는 커녕, ‘병신, 이것도 저것도 못하더니 결국 죽어버렸네’ 라고 생각할 것 같아 힘들었다고 한다.

병신이라는 말은 요즘에 쓰면 안되는 말이라고 알고 있는데 저 문장에 너무 찰지게 와닿아서 솔직히 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 단어를 잃는 건 좀 아쉬운 일이다. 욕이라는 것 자체가 비하적 의미로부터 탄생하는 어휘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모순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예를 들어 누구를 개새끼라고 부를 때는 인간답지 않다는 의미를 두는 것이지 죄없는 개의 못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썅년은 썅년이지 출신이 미천한 여자가 아니다. 그래도 불편함을 피하고자 저런 단어들은되도록 피해야지, 생각하다가도 그 작은 결점들을 제거하고 나면 뭐가 남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 ‘청춘의 감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젊은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쿨함과 돕함은 섣불리 재현하려 했다가는 하이트 광고처럼 처참하게 핀트를 벗어나게 마련이다. 이것은 무슨 마법일까?

분석적인 차원에서 나는 청춘의 감각이란 생명력보다는 죽음에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젊고 멋진 것들은 대부분 건강의 반개념 같은 것들을 끼고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선) 술, 담배, 마약은 물론이고, 마른 몸, 당장이라도 허리 질환을 일으킬 것 같이 늘어진 자세, 영혼의 창이라는 눈을 모자나 선글라스나 머리카락으로 가려 숨기는 것, 얼굴에서 웃음기를 제거하는 행위, 등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일 수 있다. 그들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 자체의 특수성에 대해 인지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죽음의 감각에 더 이끌리는 사치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걸 맥주 광고는 건강하고 밝은 애들의 기운찬 한 때로 해석하고 포장한다. 순 거짓말이다. 애들이 맥주를 마시는 건 정신을 잃고 어둠을 맛보기 위해서다. 단언컨데 건강과 설레임과 늘씬한 다리 같은 것들은 비청춘이 그리는 청춘이다. 청춘은 불안과 비밀과 자신없음의 삼단 콤보 같은 존재이고 그걸 잊어버리는 순간 그 어떤 청춘물도 진짜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욕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그 문장 때문이었지, 병신. 이것도 저것도 못하더니 그냥 죽어버렸네.

만약 내 묘비명에 누가 저런 말을 적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인생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욕이라는 것도 기대가 있는 데다가 하는 거니까.

 

lil’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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