헴스트링에 쌓인 화를 풀다가

내 헴스트링에는 화가 존나 많아서 잘 안풀리는구나. 라는 크나큰 좌절을 느꼈다. 도대체 한쪽 발을 공중에 들어올리는 동작이 뭐가 그리 힘들단 말이냐.

하지만 내 몸은 벌벌 떨고 있었고 땀은 비오듯 흘러내리고 오른쪽 고관절 안에는 돌멩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답답-한 가동범위의 명백한 한계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 그 생각을 했다.

시벌 살기 위해서 하는 거다. 내가 오늘 여기서 이 다리 한쪽을 5센치 들어올리는 걸 포기하면 언젠간 대학병원가서 신경 주사를 맞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일 하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하고 앉아 있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돌덩이가 든 것 같아도 들어보란 말이야.

생각이야 이렇게 했지만 솔직히 너무 아팠다. 아프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근육이 한계치를 자꾸만 칠 때, 남들이 내려가는 각도의 30 퍼센트만 내려가는데도 곧 터져버릴 것 같을 때. 온갖 욕들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진실이 또 뒤통수에 때려박혔다.

절대로, 절대로 훈련의 고통에 익숙해지는 일은, 편안해지는 일은 없겠구나.

수백번을 아침 알람 소리에 깨어도, 매번 똑같이 더 자고 싶은 것처럼, 매번 똑같이 힘들어 뒈지겠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겠구나.

뭐 그랬다.

이제는 그냥 뭐든 다 할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들은 두렵고 무섭고 괴로운 것들 뿐이다. 혹자는 그 두려움을 가치의 척도로 대충 환치시키면 맞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두려울수록 더 가치 있는 일일 거라고. 만사가 두렵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요즘엔 그 말을 새겨두려고 한다.

그래, 정말 그걸 척도로 여겨봐도 되겠지. 그런데 정말 왜 이렇게 겁이 나지. 어쩌면 나는 항상 겨우 용기를 내어 연명하던 겁쟁이였던가.

주류로부터 정체성을 정의당하는 위치에 있는 자가 그저 자신을 증명해내기 위해 갈 때까지 갔다 온 후의 적막함에 대한 짧은 글을 읽었는데 이상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남자 동료들이 어디 모여 앉아 있을 때 그 느낌을 받는다. 이를테면 작업실을 구할 때 나는 그들이 널부러져 있던 지하실의 책상 한 칸에 반가이 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아쉬울 것도 없는 딱 고 수준의 작은 벽이, 욕지꺼리와 액션 시퀀스를 좋아하는 나를 외롭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게 그 느낌인가 했다. 결코 ‘메이저’가 될 수 없는 자가 느끼는 벽. 삶의 중반부에야 슬슬 나도 느끼게 되는 그 벽. 그렇지만 어떤 놈에 의하면, 누구든 각자의 참신하고 고유한 제약들을 지고 세상에 나온다. 그건 그냥 조건이다.

삶을 둘러싼 켜가 가족과 친구로 이루어진 1차적인 원과, 일과 동료로 이루어진 2차적인 원, 그리고 사회라는 3차의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는 한 동안 2차의 원에서 도망쳐 1차의 작은 원 안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나는 그 1차의 원 안에서 겨우 용기를 끌어모아 밖으로 나서곤 했다. 지금은 2번째 동그라미로 용기를 내어 걸어 나가야 할 때인데, 하여간 두렵다.

그러면 1차의 원 안은 어떻게 되었나, 곰곰히 생각해봤다. 생각해보면 가장 가까웠던 자들은 아예 원 밖으로 사라진다. 그들은 가장 내밀했던 연인들이고, 함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너무 가까웠기에 싸우고 상처를 만들고 사라져 버린다.

결국 남는 자들은 나머지, 서로에게 이끌리고 기대하고 매료되어 부딪혀 본 적 없는, 적당히 다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중간자들이다. 기대도 불꽃도 없이, 적당한 존중이 있던 사람들. 입술이 닿을 일 없었던 이성들, 같이 일하다가 틀어질 일 없었던 동료들. 이제는 그들이 진심으로 존재가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런 게 좀 쓸쓸한가? 생각을 해 봤다.

사람을 꽤 좋아하는 나는, 가장 좋아했던 사람들을 다 잃었다 생각할 때면 조금 후회도 된다. 그냥 적당히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냥 적당히. 그렇게 생각하니 더 쓸쓸하다. 그래 차라리 지금의 이 쓸쓸함이 낫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다.

삶에는 분명히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구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도, 내게는 늘 세상의 비바람을 같이 막아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줬다. 궁시렁거리면서 욕하면서도 어쨌든 그들은 휘청거리면서 붙잡아 달라고 외치는 나를 (차마) 버려두지 않았다.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요새는 자주 생각을 한다. 과연 내가 그걸 갚을 수 있을까. 그들이 주저앉을 때 멱살잡고 너 이 새꺄 그렇게 살면 내가 용서 안해 이딴 소리하면서 끌고 일으켜 세워서 목적지까지 통과시킬 수 있을까.

쾌락을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 시기는 인생에서 좀처럼 드물지 않을까 싶고, 아마 다 지나간 것 같다. 이제는 겁을 아는 나이가 되었고, 고통을 아는 몸이 되었으니 두려움의 법칙에 의거하여 두려움이 가장 큰 방향으로 발을 옮겨야지 싶다.

망할놈의 고관절을 들어올릴 때처럼.

 

lil’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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