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와 용기

바다에서 파도를 마주하고 돌아온 주에, 무엇가가 또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고, 시야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니지, 그냥 시야의 문제일 것이다. 시야가 달라지면 태도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제는 반쯤 뻥을 얹어서 시간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고무줄처럼 늘렸다가 줄어들었다가 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시야라는 것도 좁아질 때는 한없이 좁아지고, 특히 고통의 순간에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안간힘을 써서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고 나서야 그 쪼그라든 시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안간힘을 쓰지 않으면 거리를 둘 수가 없으니 끝없이 안간힘을 쓰면서 사는 수 밖에 없겠구나,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떴더니 병이 나았어요, 이럴 일은 없다는 거다.

결국 찾고자 하는 키워드는 ‘용기’라는 걸 그 바닷가에서 알았다. 내게 필요한 것도 용기다. 용기가 없으면 세계를 왜곡해서 해석하게 된다. 그 왜곡된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어디 탓할 데를 찾아도 떳떳하지가 못하다.

이러나 저러나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이 과정이 매우 뿌듯하다. 마치 근육을 단련하여 튼튼한 팔다리를 만들듯, 용기라는 것도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와의 조우로 단련을 해야 하는 게 틀림없다. 결국 아무짝에 쓸모없는 노동을 했을지언정, 마음의 근육을 키웠다면 그 자체로 괜찮다.

언제나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쪽팔려야 되는 것 같다. 그게 근력 운동의 하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도 불편하지 않으면 그건 운동이 아니다. 똘이 같은 개처럼 자신의 영역에서 프라이드를 지키고 살고 싶으면 낯선 사람이 던지는 소시지 정도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하겠고, 이런 것들이 명확해지는 것 같아 좋다.

 

lil’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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