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건너야 보이는 것들

늘 다니던 카페에서 타자를 치다가 머리를 식히러 나와 길을 걸었다. 그런데 늘 걷던 쪽 인도에서 건물 하나를 부수고 있었다. 건물 부수는 데를 지나갈 수는 없으니 길을 건넜다. 그래서 나는 자주 걷던 길을 건너편 인도로 걷기 시작했다.

날씨는 서늘했고 갓 비가 그친 후였다.

카페에서는 몇 가지 생각을 했고 그간 써온 시간들과 방향들을 (또!) 수정해야겠다 마음 먹은 후였다. 말이 쉽지 길을 바꿔 걷는다는 건 결국 또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알고리즘을 믿는다면 마땅히 또 그렇게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길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렇게 뺑뺑이만 돌다가 아무 데도 가지 못하면 어떡할까라는 불안감도, 혼자 걷는 길의 외로움도 커진다. 결국 길을 잃고 만다면, 혼자 주저앉아 울게 될까. 그리고 그때는 다시 찾아갈 집도, 어깨를 토닥여줄 누구도 곁에 남지 않게 될까.

뒷짐을 지고 아저씨마냥 걸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들 때 할 수 있는 일은 ‘이럴 때 술을 마시면 안된다’ 라는 되뇌임 뿐이었다. 이럴 때 술을 마시면 우리 삼촌처럼 될꺼야. 총명한 언어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나가던 그 삼촌은 언젠가부터 술을 많이 마시면 벌건 얼굴로 내 등을 아프도록 탁탁 치면서 ‘야 너 잘난척 하지마. 날 무시하지 말란 말이야.’ 같은, 다음 날 기억 못할 말들을 하신다.

이럴 때 술을 마시면 그렇게 되는 거야, 속으로 되뇌였다.

아침에는 친구와 싸움 아닌 싸움을 했다. 정확히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에 그냥 내가 혼자서 화를 냈다. 그 친구가 가볍게 한 말이 요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닭장에 든 닭처럼 서로를 쪼아대는 게 슬펐고 타인의 영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슬펐다. 차라리 주먹으로 치고 받고 싸우지 처음부터 불균형하게 셋업된 정신의 세계에서 상대가 얼마나 취약한지도 모르는 채 후두려 패는 게 미웠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는 종이 본디 잔인함으로 성공한 종족이라고 하니까.

자살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좀 생각했다. 얼마전에 지인의 고모가 자살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미움을 받았고, 또 미움 받을 만했고, 그래서 외로웠다. 그런 사람이 약을 먹고 죽었기 때문에 부검을 하고 수사를 하느라 장례조차도 쉽게 못 치르게 한다며 자녀와 친지들은 마지막까지 화를 냈다. 지인은 그 말들을 내게 자꾸만 내뱉었는데, 그 말들이 일으키는 스트레스 때문에 나를 포함한 사람 여럿이 결국 또 서로 짜증을 내며 신경을 긁는 것을 보았다.

최근에 알게 된 한 남자는 자기 아내의 목을 조르고 배를 걷어차고 입을 찢으려고 했다. 상처입은 유기견처럼 그는 나약하고 난폭하고 비굴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남자의 자신감을 복돋우려고 내가 했던 말들이 유령처럼 머리를 떠돌았다. 그들의 관계가 일으키는 크고 작은 폭탄들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다른 이는 결국 집에 가서 제 가족과 싸우며 폭언을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기는 무섭다며 엉엉 울었지만 감정과 스트레스에 눈이 뒤집어진 부모의 싸움을 막지 못했다.

이럴 때 술을 마시면 안되는 거야. 술을 마시면 눈이 뒤집어지잖아. 눈이 뒤집어지면 끝장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는데, 처음으로 맞은 편 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기에 저런 가게가 있었구나. 응? 저런 가게도 있었네. 아니지, 있다는 건 알았는데 저렇게 예쁜 덴지 몰랐는데.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 지금 내가 이쪽편에서 저 길을 처음 보는구나. 늘 저쪽 편으로만 다녀서 몰랐던 거구나.

나는 처음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그 길에 늘어선 가게들을 꼼꼼히 살폈다. 날씨 탓인지 그 거리의 적당한 한산함과 적당한 생기가 기분 좋아 보였다. 별 쓸모는 없지만, 2000년도의 가로수길을 걸을 때처럼, 뭔가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의 호젓함을 원하는 이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았구나, 같은 생각들이 들었다. 보이지 않던 상호들이 보이는 와중에 사촌 동생이 그렇게도 찾던, 비싸지 않고 간소한 웨딩 드레스를 만드는 샵을 발견하고 명함을 얻어왔다. 찾을 땐 그렇게 안 보이더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괜히 안 가던 골목들을 한 바퀴 돌았다. 낯설고 이상했다. 불과 몇 주전에 한 블록 건너를 걸으면서 역시 이 동네는 촌스러워 라고 생각하던 기운의 정반대 같은 게 흐르고 있었다. 내가 파리나 도쿄 같은데서 이런 동네를 걷고 있다면 분명히 아무 이유없이 좋아했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거다.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간의 부드러운 빛과 서늘한 저녁 공기까지 겹쳐지자 당장이라도 저 테라스에 앉아서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시키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 술을 마시면 안되는 거야.

다시 카페로 돌아왔을 땐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도 좀 사그라들었고, 아까 봤던 피자가게에서 피자를 사먹고 싶었던 욕망도 좀 가라앉았다. 익숙해지자.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익숙해지자. 어차피 그 부부는 올해 내로 헤어지지 못할 거야. 그 고모는 최소 6개월은 미움받을 거고, 처음부터 온전한 제 자리가 없어 늘 불안하던 아이돌 가수는 더 불안해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겠지. 날 친구라고 붙잡아 놓고서 흠만 잡고 헐뜯던 그 사람도, 처음 만난 어린 인턴한데 너무 말랐는데 혹시 갑상선 질환이 있는 건 아니냐고 걱정하듯 물었다던 에디터도 각자 제 지옥 속에서 살겠지.

그런 것들이 습한 날의 물기처럼 어깨 뒤에 차오를 때면 잠시 길을 건너서 걸어야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lil’pain

 

 

 

 

2 thoughts on “길을 건너야 보이는 것들

  1.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문장이 나올 때마다 긴장되어서 그런지 글 전체에 묘하게 서스펜스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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