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첩성

언제나 그렇듯이 삶의 고통을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책으로 배워보려는 바보같은 취미생활을 지속하다가 ’emotional agility’ 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내용이야 뭐 천만번째 다이어트책처럼 뻔한 지혜들로 도배되어 있었으니 얘기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문득 ‘agility’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 궁금했다. 영문 서적을 읽을 때면 대충의 뜻을 알고 있으면 그냥 넘어가버리지 굳이 찾아보지는 않는데 내가 멋대로 ‘agility’를 ‘유연성’ 정도의 느낌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게 맞기는 맞나? 하고 검색을 해봤더니 바로 뜨는 단어는 ‘민첩성’ 이었다. 오… 비슷한데 의외였다. 민첩성이라니. 그건 마음의 유연함보다는 몸의 속도 같은 걸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던가. 저자가 그래도 생각보다는 범위를 좁혀서 말을 썼구나.

민첩성에 관해서라면 예전 학부때 일을 기막히게 빠르고 완벽하게 해내던 슈퍼 능력자 선배에 관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모두가 기말 프리젠테이션 같은 걸 마지막 순간까지 밤새워서 하는데 그 선배는 유독 하루 전에, 여유롭게, 그것도 널럴하고 기발한 스타일이 아니라 노동 집약적인 초고퀄리티 스타일로 끝내버리곤 했었다. 한 번은 친구가 그 선배에게 아주 진지하게 ‘어떻게 남들보다 일을 그렇게 빨리 하나요?’ 라는 질문을 했다는데 그 선배는 역시 아주 진지하게 ‘응, 몸을 빨리 움직이면 돼’ 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하며 범접할 수 없는 고수의 비법을 듣기라도 한 듯 뒤통수를 치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

몸을 두 배로 빨리 움직이면 일이 두 배로 빨리 끝난다.

갑자기 그 말이 떠올라 곱씹어 보았다. 아 씨발 맞는 말이 아닌가? 멘붕이 올 때 오더라도 두 배 빨리 치우면 데미지가 줄지 않겠는가? 걸레를 빨리 짜고 바닥을 빨리 닦으면 밤에 잘 시간도 그만큼 생기지 않겠는가?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이 번뇌의 덫에 휘둘려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 때 그 선배는 걸레를 빨리 짰다.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오늘은 빨리 살아야겠다.

 

lil’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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