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잇고

서버 접속 오류로 100장짜리 명문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시 레전드 중 레전드는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겠는가. 가족들을 다 데려가려고 다시 찾아가면 사라지는 무릉도원, 샹그릴라 같은 것.

애처로우니 거짓말은 그만두겠다. 썼던 글은 퍼포먼스와 익스피리언스에 관한 것으로, ‘섹스’ 카테고리를 점령하기 위해 던진 글이었으나 역시 나는 섹스보다는 고통이 어울리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삶은 경연이 아닌 경험으로 대해야 한다는 무슨 자기계발서의 문구를 보고, 섹스를 퍼포먼스로밖에 접근해보지 않은 사람들을 떠올렸던 게 화근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퍼포먼스 마인드로 접근하는 섹스까지 갈 것도 없이, 배설 정도의 마인드로 접근하는 섹스도 존재할 것 같다. 다행히 그 지경까지는 접해본 적이 없는데, 그 가능성을 생각하니 마음이 좀 씁쓸하다. 그렇게 쉽사리 폭력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분야인데 제발 잠자리에선 뇌든 입이든 꺼줬으면 하는 부류 정도로 역정 내는 건 너무 편한 소리일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하려던 얘기는 지인이 친구 아버지 칠순 잔치에 갔다가 가라오케 댄스 무대에 끌려간 얘기였다. 지인이 사진을 좀 찍어보려고 얼쩡거리는데 한 할머니가 그의 손을 덥썩 잡고 할머니들의 광란의 춤 스테이지 한가운데에 데려와 그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참지마. 참지마!”하고 외쳤다고 한다. 춤치인 지인이 그 추임새에 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가라오케 네 박자에 그 목석같은 몸을 조금씩 내어줄 때, 그 할머니는 눈빛을 반짝이며 “그래! 그래!”라고 외쳤고 지인의 손을 자신의 엉덩이에 쓰윽 갖다 댔다고.

갑작스러운 청년 남성의 등장에 할머니들은 무슨 섹스 심벌마냥 지인을 둘러싸고 플로어를 달구었고, 그 춤판에 있던 유일한 다른 남성인 중년 아저씨는 그런 지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 무한히 깊은 동질감을 담은 눈빛으로 끄덕, 하고 소리없는 인사를 주고 받았다고.

그래 사실 렛잇고는 중요하다. 삶의 무수한 작은 스테이지들 앞에서 위축되거나 굳어 있을 땐 그 할머니의 “참지마! 참지마!”를 소환할거라고.

그런데 나처럼 무슨 박자를 틀어도 팔다리 목이 박자에 동기화 되어버리는 인간에게는 렛잇고만큼 중요한 것은 ‘흥을 타지 않아야 할 때 타지 않는’ 훈련이다. 흥의 파도가 몰려올 때 죄송합니다, 지금은 안되겠습니다, 하고 정중히 돌려보내는 식의 렛잇고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 동네 카센터에 아주 귀여운 검정색 개가 있었다. 그 개는 목줄도 달지 않은 채 늘 스핑크스같은 도도한 자세로 카센터 문 앞에 앉아 고개를 곧게 들고 거리를 구경하곤 했다. 그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녀석은 뭔가 알 수 없는 여유, 결코 화려하고 큰 종도, 부잣집 개도 아니지만 딱 자기 영혼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여유를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개를 좋아했다.

우리는 멋대로 그 개를 ‘토리’라고 불렀다. 그런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 개였다. 하루는 토리에게 주고 싶어서 편의점에서 소시지를 일부러 사서 앞에 놓아 주었다. 모르겠다, 그걸로 어떻게 토리의 호감을 사고 싶었던 마음도 컸을 거다. 그래도 저런 탐스러운 소시지인데 당연히 와서 먹을 줄 알았다. 그런데 토리는 그냥 앉은 모양 그대로 소시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빛이 조금 흔들린 것도 같았다. 정말 뚫어져라 소시지를 쳐다봤다. 그렇게 10초쯤 지났을까, 토리는 마침내 무언가를 마음 속에서 지우듯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말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완전히 반해버렸다.

토리는 그런 개였다.

시간이 흘러 카센터가 사라졌다. 토리도 그렇게 다시는 못 보는가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골목길 뒤쪽을 토리와 (구) 카센터 아저씨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너무 반가워 아저씨에게 인사를 했다. 놀랍게도 토리의 진짜 이름은 ‘똘이’였다.

똘이의 멋은 말하자면 그거였던 것 같다. 네박자 틀어놓는다고 바로 일어나 춤추지 않는 멋? 소시지라면 달려가 낼름 집어 삼키고 침을 흘리며 더 달라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혀를 내밀지 않는 멋. 그런 멋.

 

lil’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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