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

모든 상태에는 비교급이 필요하다. 싸고 맛있는 음식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비싸고 맛없는 음식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빅뱅에는 대성이 있어야 하고 비틀즈에는 링고 스타가 있어야 비로소 GD와 존 레넌이 살아난다(는 의견은 내가 아닌 대중문화 관련업을 하는 어떤 분의 확고한 말씀).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 중심 도시의 청명한 하늘과 날카로울 정도로 선명한 시야의 한가운데 서는 순간에야 입술 끝에서 나즈막한 쌍욕이 터져나왔다. 맞아 이게 하늘이었지. 이게 눈으로 뭘 보는 기분이었지. 이게 카메라에 풍경을 담는 기분이었지.

언제부터인가 스멀스멀 서울의 대기에 기어들어온 미세먼지가 탁하게, 흐리게, 숨막히게 만들어온 환경을 어느새 감각의 설정값으로 쓰고 있었구나. 모르긴 몰라도 그 하늘이, 그 먼지가 무드에도, 판단에도, 하루하루의 작은 태도들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봄날에 감사하는 마음이나 귀로 듣는 음악에도, 보는 영화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몇 달 전에 술을 끊다시피 했다. 폭음가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일이겠냐만 한 5년간 정기적으로 ‘술을 끊어야겠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십대부터 줄곧 나의 친구이자 모든 사회적 관계와 외로운 밤들을 함께 했던 그 물질을 굳이 인생에서 빼보는 꽤 큰 실험이었다. 캐롤라인 냅이 쓴 책 ‘드링킹’을 읽어서 그렇게 됐다. 그 저자가 털어놓는 감정들이 소름끼칠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와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다른 사람이 그 책을 읽고 비슷한 코멘트를 했었는데, 그런 게 바로 잘 쓴 글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하루에 맥주 한 캔을 제거한 것 뿐인데, 딱 여행지의 하늘을 마주할 때 같은 느낌이었다. 뭘 닦아내고서야 시야가 흐렸다는 걸 깨닫는 기분. 어떤 감각들을 내가 무디게 만들고 있었는지, 잊고 있었는지가 그제서야 보이는 기분. 다행스럽기도, 억울하기도 한 기분.

점진적으로 무뎌지는 것들. 무슨 탕인지 하여간 생선(?)을 넣은채로 물의 온도를 서서히 올리면 뜨거운지 모르고 죽는다는 얘기 같은 것들을 생각했다. 예를 들어 어느새 험해져 있는 인터넷 댓글들. 야금야금 시야에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내가 보는 세상을 또 더럽히고 있을까.

여행은 그런 점에서 매우 유익한 활동 같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문화권마다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의 선이 다르다는 점이다. 태국에선 과일을 깎은 뒤 문양을 내지 않고 서빙한다는 것은 시장통에서도 상상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있는 거고 일본에선 아무리 집이 작아도 그 신을 모시는 공간은 갖추어야 했고 프랑스 남부의 어떤 작은 마을에서는 백년 된 건물이든 어제 지은 건물이든 어떤 형태의 아치 장식이 창과 문에 들어가 있었다. 아마 그 마을에선 누가 신축 건물을 지으면서 무늬로라도 그 아치를 집어넣지 않으면 천하의 반사회적인 놈이라며 동네 주민들이 그걸 볼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겠지.

다른 얘기지만 거의 모든 곳에서 차이에 대한 반응들이 점점 격렬해지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위협을 느끼기 때문일까? 혹은 그저 여유가 없다는 증거일까? 각 개인들의, 무리들의 세계가 저 프랑스 마을만큼이나 좁은 동네 안에 갇혀서 곤조 부리고 있는 걸까. 무엇을 걷어내면, 무엇을 끊어보면 알 수 있게 될까.

 

lil’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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