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의 문제와 인간성

유머는 여러가지 힘든 것들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성숙한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생각보다 그게 배타적이라는 거다.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언어와 가치관이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해야 농담이라는 걸 칠 수 있다. ‘그 돈까스가 너무 맛이 없어서 살기를 느꼈다’ 같은 말 정도만 해도 최소한 저 친구가 실제로 주방장이든 누구든 살해하는 것이 아주 잘못된 일이라는 것에 대한 확고한 합의가 없으면 굉장히 불편한 발언이 된다.

그런데 요즘이 딱 저런 기분이다. 비유하자면 ‘아 맛없어 죽고 싶어’ 라던가 ‘아 맛없어 죽여 버려’ 같은 말을 누군가 뱉으면 진심으로 쟤 자살하려나? 아니면 쟤 살인하려나? 부터 고민해야 될 것 같은 기운이 사방에 넘치고 흐른다.

어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그냥 뻔한 일상을 사는 일반 사람들이 도대체 왜 자기네 인생에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동성애자들을 적극적으로 싫어한다는 표현을 하고 또 거기다 힘과 감정을 소모하는 걸까 납득을 할 수 없다며 혀를 찼다. 진보 진영의 대선 후보가 한 말도 말이지만, 최소한으로 공유한다고 생각했던 스탠다드가 이렇게도 달랐나 싶게 사람들이 내뱉는 소리들이 일으키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이해가 안 갔던 건,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하는 활동이 발언자의 인생에 정말 아무런 하등의 실질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게 너무 자명해서이다. 도대체가 남이사 누구랑 자든 무슨 상관인가.

그러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혐오 발언자(?)들의 어휘를 살펴보니 논리가 이렇다. ‘늬들이 동성애자도 아니면서 핏대 세우고 동성애자 인권을 말하는 건 멋있고 똑똑해 보이고자 하는 위선’ 이라는 거다. 또 저런 소리를 들으면 어이가 없어서 결국은 경멸의 언어를 쓰게 된다. ‘도대체 얼마나 무식하면 저렇게 의도를 해석하지? 상종을 못하겠네’ 그때 알았다. 아, 이건 감정의 문제구나.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서로 인정을 안해버리니 감정을 방어하는 모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오고가는 말들. 공유되지 않는 스탠다드를 두고 일단 배타적인 감정싸움으로 시작된 이야기들이라 아무런 진전이 없다.

누가 진지하게 각잡고 앉아서 ‘타인을 포용하는 원칙을 지켜야 우리 자신도 안전함을 느끼는 사회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언제든 약자가 되는 순간이 올텐데…’ 어쩌고 이빨을 까봐야 가르치려 드네 어쩌네 하겠지. 그냥 못된 애들은 자기가 운이 좋아 타고난 포지션을 놓기가 싫은 거고 사회적 핑계(진보 진영 대선 주자도 그렇게 말하더라, 같은)만 주어지면 벌떼처럼 못된 짓 하는 거 같다.

아 이런 전개를 생각한 게 아닌데… 갑자기 다시 화에 휩싸여 버리네. 이런 거다. 그냥 갑자기 화가 나버리면 스트레스 받아서 무슨 얘기든 집어치우고 싶다.

그런데 인간성은 좀 과소평가되는 측면이 있는 듯하다. 드러운 인간의 본성 하면 제일 자주 인용되는 스탠포드대 모의 교도소 실험을 취재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공포에 부르르 떨며 아는 그 일화(임의로 일반인에게 수감자와 교도관의 역할을 배정했더니 하루만에 교도관들이 인간 이하의 폭력성을 보이며 수감자 역할을 한 자들을 학대해서 2주짜리 실험을 6일만에 접어야 했다는)의 이면에는 꽤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더라는 이야기였다.

CCTV로 확인한 바 유독 교도관 쪽의 한 사람이 유별나게 미친놈처럼 언어폭력을 행사했는데 그 사람이 남부 출신이 아닌데도 계속 텍사스 억양 같은 걸 쓰는 거다. 마치 ‘포악하고 폭력적인 텍사스 교도관’을 연기하듯이 말이다.

취재자는 (아마 존 론슨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실험 참가자들을 추적해서 인터뷰를 했는데, 문제의 그 미친놈은 당시를 회상하며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노력’을 했었다고 회고했다. 실험의 초기에는 그야말로 진짜 교도소처럼 교도관들은 단순히 먹을 것을 감방에 넣어주고 밖에서 지키고 하는 일상적인 시간들이 흘러갔는데 본인이 느끼기에는 (담당 교수의 뜨거운 기대와는 달리) 실험이 뭔가 성과를 못 내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교도관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실험을 진행하던 교수로부터 ‘심리적은 모욕감을 주거나 무엇을 해도 된다’는 문장을 포함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억한다. 교수는 그러고선 무슨 감독처럼 본인이 모의 교도소 세트에 앉아 있기도 했고. 핵심은 피실험자들은 어느 정도는 교수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압박을 받았다는 점이다. 교수가 나쁜 놈이라는 소리는 아니고, 무려 심리학 실험인데 현대의 기준으로는 신빙성을 얻기 어려울 만큼의 설렁설렁함으로 세팅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거의 일종의 메소드 연기 실험은 아니었을지.

아무튼, 화제가 되었던 끔찍한 하이라이트들은 대체로 그 텍사스 사람 아닌데 텍사스 억양으로 소리치던 그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디테일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화제가 되는 것, 이야기거리가 되는 것, 마음 속에 각인되는 것들은 끔찍하고 못된 것들이다. 유전적으로 그렇다고 한다. 행복도 사랑도 좋지만 목숨은 보전해야 하니까 공포와 분노 같은 것들이 더 잘 기억된다고 했다. 코미디 영화는 막장 영화보다 광범위한 관객을 이입시키지 못한다.

결국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더 따뜻하다는 걸 믿고 싶다. 그저 무리의 방향을 따라 같이 움직이는 송사리처럼 연약할 뿐. 그리고 교도소는 교도소장의 영향을 받으니 정신차리고 교도소장들을 잘 살펴보며 살자.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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